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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2화 콰아앙─
빌딩의 잔해 속으로 처박힌 미궁을 흘깃 바라보던 닉스가 제 머릿속의 또 다른 미궁을 향해 물었다.
‘저렇게 활개 치고 있는 걸 보면, 갔던 일이 잘 안 풀린 모양이지?’ [음. 꽤 깊숙이 숨어버려서 말이야. 못 찾을 정도는 아닌데, 차라리 본체를 찾아가는 게 빠를 것 같아서… 그런데 저런 상태인 줄은 몰랐네.] 짧게 혀를 차는 목소리와 함께 무너진 빌딩의 잔해 속에서 날카로운 강기가 날아왔다.
급히 몸을 피하는 닉스를 쫓아, 가르시아의 몸을 차지한 미궁이 창을 내뻗었다.
창끝이 이리저리 휘어지며 그 궤적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신묘한 움직임이었다.
그에 닉스가 마안을 사용해 침착하게 대응한다.
그의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울렸다.
[몸을 완전히 차지했네. 얼씨구? 본체와 연결까지 해놓았어? 이제 아예 대놓고 규율을 어기는구나.] 못마땅하다는 듯 쯧쯧- 혀를 차는 목소리에 닉스가 물었다.
‘어떻게 할 방법이 없나?’ [안타깝게도 뾰족한 수가 없네.] 아찔하게 눈앞을 스쳐 가는 도끼를 피한 닉스가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미궁의 합류로 심적인 안정을 얻은 것과 별개로 녀석에게도 별다른 방법이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치만 정말 방법이 없는걸? 여의주라도 있었다면 몰라도… 아니, 여의주가 있어도 무리려나? 저건 이미 미궁 그 자체니까.] ‘별 방법이 없다면 조용히 있어라. 정신 사납다.’ 화려하게 눈앞을 수놓는 공격들의 향연에 닉스가 눈이 아프도록 눈알을 굴렸다.
석화, 정지, 굴절 등의 마안을 활용해 최대한 막아보지만, 장난기를 벗어던지고 진지하게 임하는 미궁에게는 조금 엿부족이었다.
마치 사신의 그것처럼 거대한 낫에서 줄줄 뻗어져 나온 강기가 비늘을 훑는다.
급히 비늘 위로 마력을 끌어올린 덕에 상처 자체는 얕았지만, 평소와 달리 곧바로 재생되지 않았다.
[보통 무기들이 아니야. 아무래도 널 대비해서 만든 것들 같은데… 저 정도 숫자에 저만한 수준이라면 에너지가 장난 아니게 들었을 텐데… 다 회수할 자신이 있다는 건가?] 나지막이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닉스가 몸을 움직였다.
닉스 역시 마냥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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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리파워볼 그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눈부신 속도로 닉스의 주둥이가 미궁의 한쪽 팔을 물어뜯는다.
터져 나오는 EOS파워볼 피 분수와 함께 뜯겨 나가자마자 멀쩡히 재생되는 팔.
곧장 망치를 휘둘러오는 미궁을 피해 닉스의 몸이 유연하게 움직였다.
휘이이잉미궁의 망치질이 텅 빈 허공을 가른다. 로투스바카라
한순간 크게 드러난 빈틈을 향해 닉스가 브레스를 내뱉었다.
화아아악─ 로투스홀짝 그와 함께 섣불리 끼어들지 못하고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다른 몬스터들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번쩍이는 화려한 공격들 오픈홀덤 속으로 미궁의 모습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방심하지 마. 저걸로 안 끝나.] ‘알고 있다.’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답한 닉스가 찌르르 울리는 직감에 급히 몸을 피했다.
불쑥 솟아오른 창 한 자루가 방금까지 닉스가 있던 자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쏘아진 창은 한 자루가 아니었다.
몇 개는 재차 닉스를 노리고, 나머지는 다른 몬스터들을 노렸다.

스노우나 레이시아, 기류는 어찌어찌 몸을 피했으나, 나머지 몬스터들은 아니었다.
이미 한계까지 몰려 있던 바야바가 그대로 쓰러졌으며, 허공을 유영하던 멜류시오가 날개를 꿰뚫린 채 추락했다.
아리파의 조개껍질이 한쪽이 완전히 박살 났으며, 옥타비아의 문어발 수십 개가 깨끗이 소멸했다.
단번에 SS랭크의 몬스터 여러 체를 무력화시킨 미궁이 이전처럼 말끔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미궁의 시선이 잠시간 닉스를 향한다.
“…이 기척. 그래, 느껴져! 왔구나, 형제여─!” 환하게 미소 지으며 소리치는 목소리에 또 다른 미궁, 001 – 002가 짧게 혀를 찼다.
[누가 네 형제야?] “오랜만이야. 다른 동포들과는 잘 만나고 왔어? 솔직히 다른 녀석들도 아닌 네가 동포들과 함께 올 줄은 몰랐어.” [나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안다고. 어쨌든 너 때문에 잔뜩 허탕만 쳤어. 그리 깊숙이 숨은 걸 보면 너도 어지간히 쫄렸나 봐?] “흐흐. 제아무리 나라도 그만한 숫자의 동포들은 무서울 수밖에 없지. 특히나 내 소중한 형제가 함께인데, 당연히 숨을 수밖에 없잖아?” [그런 놈이 이런 짓을 벌여? 도대체 규율을 몇 개나 어긴 거야?] “들키지만 않으면 아무렴 좋지 않겠어?” [이미 다 들킨 놈이 뭔 소리래. 그냥 얌전히 죗값이나 치뤄.] “그럴 순 없지. 이 몸만 있으면 바깥에서도 마음껏 에너지를 모을 수 있는데 말이야.” [역시 목적은 그거였나?] 조용히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미궁, 001 – 004가 활짝 팔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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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전히 찾아오기만 기다려서는 많은 에너지를 얻을 수 없지. 그에 비해서 밖은 어때? 어디를 가든 에너지가 차고 넘친다고.” [그러다 바깥의 인류가 멸종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흐흐.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따로 관리할 거거든.” [농장이라도 차리려는 건가?] “역시 내 형제야. 단번에 알아차리는구나.” [그러니까 누가 네 형제냐는 거냐고.] 평소의 무덤덤했던 목소리와 달리 정말로 짜증 난다는 듯 내뱉는 002의 목소리에 004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서 어때, 형제? 나랑 함께하지 않겠어? 밑 준비는 이미 다 끝났어. 너는 숟가락만 얹으면 된다고.” [다른 녀석들은 어쩌고?] “그 머저리 같은 동포들이야 너와 내가 힘을 합치면 아무런 문제도 없어. 오히려 역으로 그 머저리들까지 잡아먹는 거라구. 어때? 마음에 들지 않아?” 002가 ‘흠’하고 조용히 고민했다.
그런 제 형제의 반응에 004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그가 알고 있는 형제라면 이 제안을 기필코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했다.
에너지에 대한 탐욕은 그 어떤 동포들 중에서도 가장 으뜸인 것이 바로 001 – 002였으니까.
다른 멍청한 동포들이라면 몰라도 002라면 분명….

[거절할게.] “…뭐?” 멍청히 되묻는 004를 향해 002가 덤덤히 답한다.
[그 모습이 되니까, 머리까지 같이 떨어진 거야? 거절한다고, 이 머저리야.] “…어째서?” [굳이 에너지에 목숨 걸 만큼 간절하지도 않고, 지금 생활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으니까?] “…….” 004가 황망한 얼굴로 멍하니 닉스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닉스와 함께하고 있을 002를.
그로서는 도저히 지금 002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다.” [딱히 네 이해 따위 바라지 않는데….] “…도대체 어째서냐?” [어째서고 자시고 슬슬 그냥 소멸해주면 안 될까? 괜히 시간 끌다가 다른 엄한 놈들하고 에너지를 나눠가지고 싶지는 않거든. 기왕이면 자결해주는 편이 가장 좋고.] “왜지? 다른 머저리들이라면 몰라도 너라면 함께할 줄 알았는데….” [도대체 평소에 나를 어떻게 생각한 거야? 내가 왜 그런 짓을 하는데?] “…그렇다면 내 눈앞의 그것은 뭐냐? 그따위 장난감을 만든 걸 보면, 분명 너도….” [우리 닉스보고 ‘그것’이라거나, ‘장난감’ 따위로 부르지 말아 줄래? 우리 닉스는 그런 게 아니거든?] “웃기는 소리… 그걸 만든 이유는 너도 나랑 같은 게 아니었나? 그 몸을 차지해 바깥에서 에너지를 얻기 위해….” [그러니까 우리 닉스는 그런 용도가 아니래도. 혼자서 거하게 착각하고 있네.] 딱 잘라 말하는 002의 모습에 004가 꾹 입을 다물었다.
배신당한 듯한 충격 가득한 얼굴로 004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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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004의 모습에 짧게 혀를 찬 002가 닉스를 향해 말했다.
[뭐해, 닉스? 얼른 공격해. 저 머저리 놈이 정신 차리기 전에.] 덤덤히 들려오는 목소리에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닉스가 곧장 행동을 개시했다.
화아아악─ 충격으로 여전히 넋을 놓고 있는 004를 향해 닉스가 브레스를 내뿜었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숨결 속에서 나지막이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래. 알겠군… 너는 나를 처리하고 모든 것을 혼자 차지할 생각이야. 그렇지 않나?” […저 미친놈이 뭐래?] “흐흐. 과연. 최악의 동족 포식자…! 에너지에 대한 탐욕이 넘치는 네가 제아무리 형제라도 에너지를 나누어 가질 리 없겠지! 그렇지 않나?!” […헛소리하는 걸 보니, 정말 머저리가 맞나 보네. 닉스, 아주 곤죽을 만들어 버려.] 차분히 내뱉는 002의 목소리에 어느새 브레스 속에서 빠져나온 004가 소리친다.
“속지 마라, 몬스터. 너는 그 녀석에게 속고 있다.” [헛소리야. 걸러 들어.] 닉스가 고개를 주억이며 재차 공격을 서두른다.
그런 닉스를 향해 004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001 – 002. 지금 너와 함께 있는 녀석에 대해 알고 있나? 그놈은 에너지에 대한 탐욕만으로 수십, 수백의 동포들을 잡아먹은 최악의 동족 포식자! 저놈이 원하는 게 뭘 거 같나?” 검을 휘둘러 쏘아진 브레스를 두 쪽으로 가른 004가 말을 잇는다.
“흐흐흐. 너를 위한다고 속삭이던가? 어떤 달콤한 말로 너를 유혹하던가? 속지 마라! 결국, 002가 원하는 건 바로 네 녀석의 몸이다! 네 몸을 차지해 바깥에서 에너지를 얻기를 원하겠지! 원래 그런 놈이니까!” “…….” 닉스가 모든 공격을 중단한 채 가만히 004를 바라보았다.
그런 닉스를 향해 002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흐흐. 그래, 몬스터. 아주 영리하구나!” 닉스가 제 말에 흔들렸다 믿는 것일까?
004가 의기양양 웃음 지었다.
그의 목표는 002가 다른 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이대로 닉스의 숨통을 끊는 것.
제아무리 002라 하더라도 별다른 매개체 없이는 바깥에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다.
그것이 미궁이란 생물이니까.
조용히 미소 지으며 004가 슬며시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런 004를 향해, 불쑥 벼락이 내리쳤다.
단순한 벼락이 아닌, 최소 세 가지 이상의 속성을 강렬한 마력을 품은 벼락이다.
불시에 내리친 벼락에 004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크윽… 어째서…?! 말귀가 어두운 거냐, 몬스터?!” [나를 사리 분별도 못하는 머저리로 보지 마라.] “너는 지금 속고 있다! 그놈은…!” [흥. 다른 건 몰라도 하나는 확실하지. 이 녀석이 나를 속이고 있던지, 또 다른 꿍꿍이가 있든지, 어쨌든 너는 결국 내 적이란 사실 말이다.] 차분히 내뱉은 닉스가 재차 마법을 시전했다.
은밀하게 준비 중이던 융합 마법이 004를 덮친다.

서둘러 도망치려던 004를 향해 닉스가 마안을 사용해 견제했다.
“어리석은 놈…! 가르시아 꼴이 되고 싶은 거냐?!” [가르시아를 그 꼴로 만든 놈이 할 말은 아니군.] “크으윽…!” 짜증스레 침음을 흘리는 004의 모습이 그대로 닉스가 시전한 마법에 의해 사라졌다.
거대한 빛의 기둥이 폭발하듯 하늘로 솟구쳤다.
[믿고 있었다구, 닉스.] ‘웃기는 소리. 내 머릿속을 그대로 들여다보고 있었으면서 말은 잘하는군.’ [머릿속을 읽는 것과 별개로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체는 막을 수 없으니까.] 언제나 같은 덤덤한 002의 목소리에 짧게 혀를 찬 닉스가 흘깃 시선을 돌렸다.
무려 아홉 가지 속성을 조합한 닉스의 융합 마법은 지금 닉스가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이자, 최선의 공격이나 다름없었다.
이 마법을 준비하기 위해 헛소리나 다름없는 004의 말을 잠자코 들을 수밖에 없었다.
문자 그대로 작은 원자 단위까지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파괴적인 마법.
제아무리 미궁이라 하더라도 이것이라면 틀림없이….
무심코 생각을 잇던 닉스가 흠칫 몸을 떨었다.
하늘 높이 치솟은 빛기둥 속에서 끊임없이 파괴와 재생을 반복하며 004가 묵묵히 서 있었다.
그에게서 사방을 짓누르는 묵직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002가 나지막이 침음을 흘렸다.
[이거, 조금 큰일났는걸…?] 002 답지 않게 당혹스런 목소리.
딱히 더 설명하지 않아도 닉스는 이해할 수 있었다.
저것은….

【어리석구나. 감히 분수도 모르고 나와 맞먹으려 들어?】 저벅저벅빛기둥 속에서 002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차지한 가르시아의 몸이 이리저리 팽창과 수축을 반복했다.
마치 한계를 넘어선 힘을 더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듯, 가르시아의 몸이 끊임없이 흔들렸다.
【그래도 칭찬해주마. 하등 생물 주제에 너는 잘해주었다. 과연 001 – 002가 그릇으로 선택하려 한 몸뚱이다워… 하지만, 장난도 이제 여기까지다.】 나지막이 중얼거린 004의 모습이 훌쩍 사라졌다.
그리고 무언가에 얻어맞은 닉스의 몸뚱이가 땅바닥에 처박힌다.
콰아아앙뒤늦게 타격음이 울렸다.
닉스마저 제대로 반응조차 할 수 없는 미친 속도.
여전히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제 팔을 004가 거칠게 잡아 뜯었다.
터져 나오는 피 분수와 곧장 재생되는 팔을 가볍게 휘저으며 004가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애써 만든 그릇을 버리고 싶지 않다면, 당장 튀어나오는 게 좋을 거다, 002. 이런 장난감에게 맡기지 말고 어디 한번 제대로 싸워 보자.】 차분히 내뱉은 004가 천천히 닉스의 곁으로 다가왔다.
닉스가 황급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반사적으로 마안을 사용하려던 닉스의 눈동자를 004는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푸욱-
황금빛 창이 닉스의 눈을 찌른다.

“샤아아아───!!” 【하등 생물 주제에 더 이상 끼어들지 마라. 이건 더 이상 유희가 아니다.】 덤덤히 내뱉은 004는 그대로 닉스의 반대 눈마저 창을 찔러넣었다.
삽시간에 두 눈을 잃게 된 닉스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어서 튀어나와라, 002. 애써 만든 그릇이 파괴되는 걸 두고 볼 생각인가?】 꾸우욱- 004가 닉스의 머리를 짓밟았다.
비교하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크기 차이가 대단했지만, 몸 하나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저 가볍게 즈려밟은 거뿐임에도 닉스의 거구가 완전히 제압당했다.
그렇게 그가 어떻게든 빠져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순간, 여지껏 침묵하던 002의 목소리가 울렸다.
[닉스.] 평소하고 크게 다를 것 없는 목소리.
004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비틀면서도 닉스가 그 목소리에 답했다.
‘뭐냐?’ [나를 믿어?] 그것은 분명 처음 들어보는 질문이었다.
002가 여지껏 한 번도 닉스에게 물어본 적 없는 질문.
하지만 그럼에도 그 답은 알고 있을 것이 뻔한 질문이다.

그냥 평소처럼 머릿속을 읽으면 될 텐데 굳이 녀석이 이런 질물은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도 하필 다른 상황도 아닌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말이다.
절대 이런 대화를 주고받고 있을 틈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닉스는 차분히 고민했다.
닉스는 분명 002를 믿지 않았다.
신용하기는 해도, 신뢰하지는 않는다.
둘 사이에 믿음이란 말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마냥 순순히 믿기에는 001 – 002란 미궁이 너무나 수상쩍은 상대니까.
분명 호의적이지만, 정작 그 호의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조금 믿어보려 치면, 항상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처럼 의뭉스러운 태도를 보인다.
함께한 시간이 제법 되었음에도 여전히 그 속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닉스에게 있어 002는 여전히 신뢰할 수 없는 부류였다.
한차례 고민을 끝마친 닉스가 곧이어 답했다.

‘믿는다.’ 나지막이 내뱉은 말은 분명한 진심이었다.
그 호의가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항상 의뭉스럽고 그 속뜻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닉스는 지금까지 002가 보여온 것들을 믿었다.
믿어보기로 했다.
[그렇구나. 그렇다면….] 닉스가 자신을 믿는다는 사실이 기뻤던 것일까?
나지막이 내뱉는 목소리는 제법 들뜬 듯했다.
정말 평소랑 전혀 다른 없는 한결같은 태도.
아무런 의심 없이 보면 그저 순수하다고 할 수 있는 호의가 느껴진다.
이토록 일괄된 호의를 보내오는 녀석을 믿지 못한다면 결국 어느 누구를 믿을 수 있을까?
닉스의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울린다.
【네가 나를 믿는다고 했으니 나도 그에 보답해야겠지. 조금 아플 거다, 닉스.】 【서울 대미궁 ‘001 – 002’와 패스를 연결합니다.】 【진화에 필요한 모든 공적, 에너지를 001 – 002가 부담합니다.】 【개체를 선별합니다.】 【시스템 외의 등급입니다.】 【진화할 수 없… 관리자의 요청을 확인. 재차 선별을 시작합니다.】 【상위 개체로의 접근 권한이 없… 재차 관리자의 요청을 확인, 선별 재시작.】 【…선별 완료. 진화를 시작합니다.】 【모든 리스크를 001 – 002가 부담하는 것으로 진화에 필요한 시간을 단축합니다.】 【진화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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